3. '무명고지' 공격(연대 공격목표 #4의 중간목표)
나는 공격 당일(6월 7일) 08:00시 3소대원들을 인솔하고 능선을 따라 공격대기선으로 가는 도중 중대본부에서 S 소위를 처음 만났다. 그는 화기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6월 5일 전후해서 후방으로부터 전입한 것 같았는데 나는 공격준비 때문에 그와 자세한 내용을 더 이야기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런데 공격 다음 날(6월 8일) 오후 늦게 내가 공격 중 나의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 파편으로 왼쪽 무릎을 부상(파편창)당하여 '원주'비행장에 Helicopter로 후송되어 미군 후송자 대기소(분대 천막)에 도착했을 때 S 소위가 그 천막 속에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보다 S 소위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마치 무엇을 훔쳐먹다 틀킨 아이같이!
나는 그를 보고 "웬 일이야?" 했더니 S 소위는 "새벽(6월 8일)에 적의 기습으로 발을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나를 예상치도 않게 '원주'비행장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어 놀라서 얼떨결에 나에게 그의 부상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듣고 내심 아주 불쾌했으나, 그의 도망병같은 행위에 대해서, 내색은 하지않았다. 그의 부상에 대한 자세한 대화내용은 아직 언급할 때가 아니어서 후일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때 뿐만 아니라 아직껏 풀리 않는 의문은 그가 어떻게 해서 나보다 먼저 그곳, '원주'비행장에 도착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었다. 그때 미군이 들어와서 나에게 K-9(부산)으로 가는 수송기(C-54)가 곧 출발하니 빨리 수송기를 타라고 독촉하기에 나는 S 소위와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함께 비행기를 타려했는데 그는 미군의 제지로 나만 먼저 중환자로 구분되어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발했다.
그후 나는 진해 해군병원에 1개월 여일 동안 입원하고 있었는데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이런 몇가지 의문점을 나는 끝내 군생활 중 풀지 못했다. 그것은 S 소위가 그때의 내용에 대하여 그후 일절 설명이 없었고 나도 또한 나의 호기심을 위해 그에게 그런 내용에 대하여 질문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1) 부산 해군병원선
부산에 미군 수송기편으로 도착하니 나는 지난 2월에 전선으로 출동한 후 4개월 만인데 아주 딴 세상으로 온것 같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또한 이상하게 보였다. 심지어 이상하게까지 생각되었으며 마치 내가 딴 세상으로 온 것같이 느껴졌다. 부산, 2부두에 정박해 있는 해군 병원선에서 일박 후 나는 민간 선박으로 진해에 도착하여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때 해군병원선에 우리의 동기생인 통신장교가 입원하고 있었는데 왼쪽 손이 팔목부터 절단되어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그는 대원들에게 수류탄 교육을 하던 중 수류탄이 손에서 폭발하여 왼손이 절단되었다 했다. 이때 무엇보다 그를 위해 다행이었던 것은 그때 수류탄 속에는 뇌관만 연결되어 있었고 폭약은 장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사고사를 면할 수 있었다. 그후 나는 그 동기생을 해병대 근무 중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눈의 살기(殺氣)
그때 해병대 사령부가 부산 용두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동기생들을 만나려고 전투 시 입고 있던, 부상당하여 왼쪽부분이 피로 얼룩진 작업복을 그대로 입은채로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며, 그렇다하여 보기 흉할정도는 아니고, 사령부에 들어섰다. 그때 사령부는 전부 천막을 치고 있었다.
군수참모실에 근무하고 있는 후보생시절에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동기생 K 소위를 만나러 천막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타자를 치고 있던 여문관이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그 여문관은 "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타자하다 말고 밖앝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천막안에 있던 장교, 사병, 및 문관들이 전부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이들을 보면서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이들이 무슨 도깨비라도 나의 얼굴에서 보고있는 듯 한 그런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의 얼굴에서 도깨비를 본 것이 아니라 나의 눈에서 살기(殺氣)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 여문관이 나의 눈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는 이야기었다. 이들은 2일 전까지 전투 현장에서 나에게 있던 견적필살의 적개심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것을 나의 눈을 통하여 본 것이다. 나는 지난 몇개월 동안, 특히 2일 전까지 강원도의 '도솔산'에서 적과 죽이느냐 죽느냐 하는 혈투를 하고 있었으니 그 흔적이 아직껏 나의 몸전체에, 특히 눈에 살기로 남아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명은 앳된 양 수병(해군)이 부상당하여 한쪽 다리를 무릎위부터 절단된 환자로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는 상태로 해군 병원선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전혀 없었고 항상 웃음으로 차있었다.
그때부터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을시내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는 Wheel chair를 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고 아주 건강하게 보였다. 그는 이야기 중에 자기 딸이 양혜경(Talent)이라 하기에 나는 무척 훌륭한 딸을 두었다고 칭찬하면서도 놀란 일이 있었다. 그는 1급상이자이니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90년대 후반에 나는 서울시내에서 우연히 30여 년만에 "도솔산 공격" 시 제2중대 화기소대 3반장(기관총반)으로 항상 우리 3소대에 배속되었던 이봉희?이등병조(후일에 장교로 임관)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소령으로 60년대 말에 청룡부대로 파월되어 전투 중 중상을 당하여 1급상이자가 되어 국가로부터 '신림동' 소재 야산을 불하받았는데 그 지역이 주택지로 지목변경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초청으로 그의 집을 한번 방문했는데 아주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부유층에 속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매일 매일 고생하고 있는 우리의 용감했던 해병들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싫어도 보고 확인한 셈이다.
우리 동기생 중에도 한국전쟁이 서부전선에서 한참 치열할 때인 1952년 여름, 전방에서 Jeep차 사고(차가 도로변 낭떠러지에 떨어짐)로 하반신이 마비된 후 1급상이자가 됐는데 국가의 지원으로 평생 여유있는 생활을 한 동기생도 있다.
그러나 많은 전상자들(한국전쟁, 월남전)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국민과 국가 이익을 위해 싸웠지만 오늘 날의 이 국가와 국민들은 그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노병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2) 진해 해군병원
진해 해군병원에 도착하니 장교 병동은 병상이 이미 만원이 되어 나는 하사관 병동에 입원했으나 하사관 병동도 만원이 되어 복도에도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린채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은 "도솔산 전투"가 얼마나 치렬하게 피아 간에 계속되고 있고 또한 그에 따라 얼마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해 해군병원 입원( "도솔산 공격" 당시의 그 복장)
공격 첫날(6월 6일) 부상당하여 후송된 1소대장 최영남 소위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우리 보다 연령이 몇살 위였고 또 중대장의 신임도 두터워서 먼저 공격에 투입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희생자만 내고 목표를 점령못하고 1소대장은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
2소대장이었던 양봉삼 소위에 관해서는 나는 그가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가 어떻게 후송되었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는데 1953년 3월 내가 해병대 사령부 군종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 종종 나에게 찾아 왔었다. 그는 아주 온순해 보였다. 그는 곧 배를 타게 될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는데 그때 그는 이미 30대로 보였다. 그때 나는 23세의 약관이었다.
1소대장인 최 소위는 중대 공격목표인 목표 #4의 중간목표(무명고지)를 공격 중 부상당하여 후송되어 나와 함께 진해소재 해군병원에 1개월 여 동안 입원하고 있었는데 퇴원 후 최 소위는 동해부대 제43중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최 소위는 그 곳에서 근무 중 북한지역(함경도 해안지역)에 침투하여 전투정찰 중 적의 집중사격으로 적지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동작동 국군묘지에는 최 소위의 묘비는 없고 그의 위패(49-1-28) 만 안치되어 있는 불운의 동기생이다.
나는 퇴원 후 진해에서 새로 편성된 4.2"중포중대(중대장, 김동윤 중위 해간 1기)에 7월 10일부로 배치되었다가 3개월 후 중대가 전선으로 출동 시(1951년 9월 중순) 3개월 만에 다시 중동부전선(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분지. Punch Bowl)에서 전투 중인 해병 제1연대 지역으로 복귀했다. 최 소위와 나는, 우리의 운명은 이렇게 처음부터 이미 달리 정해져 있었다.
전선으로 복귀 후 나는 제1대대의 우일선에 배치되어 있는 재2중대를 Jeep를 타고 다시 방문했다. 사실은 내가 지휘하던 3소대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제2중대의 위치는 적진을 위로 올려다보는 능선하록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중대본부는 유개엄체호로 되어 있었다.
이때 제2중대는 중대장에 박희태 중위, 선임장교에 김용겸 소위, 3소대장에 김동규 소위, 그리고 김영호 소위와 박천뢰 소위가 각각 1소대장, 2소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전부 동기생(해간 3기)들이었다. 신참인 김 소위와 박 소위는 아직 전방생활에 익숙치 않은 듯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어떤 초조하고도 불안한 기색을 역역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참인 김동규 소위("도솔산 전투" 당시 60mm 박격포 소대장이었으며 나의 후임인 3소대장)와 김용겸 소위(선임장교, "도솔산 전투" 당시 나와함께 목표 #4의 중간 목표인 '무명고지'를 공격함 ) 두명에게서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전방에서는, 특히 전투 중에는 고참과 신참과의 차이는 장병을 막론하고 눈에 뜨일 정도로 현저하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별로 느끼는 것이 없을지 알 수 없으나 후방에서 다시 같은 현장으로 출동한 나에게는 그들의 차이점이 뚜렷하게 보였다.
심지어 좀 웃기는 사실은 "도솔산 전투" 중 6월 7일에 내가 소대장인 3소대가 공격할 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되어 2소대장에게 "뒤를 부탁한다"하고 내가 단독으로 적 진지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한 것을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보고 있던 해병들이 "우리 소대장님 만세, 3소대장님 만세"라고 목이 터저라고 불렀는데, 그때 현장에 있었던 3소대원이라면 자기 소대장을 잊을리가 없는데 그 해병(신병)의 '참전수기'에서 그 해병은 "3소대장님은 부상당해서 후송되었다"고만 기술한 것으로 봐서 그 해병은 그 당시 신병으로 새로 보충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전투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그 해병은 오히려 2차 공격 시 나를 뒤따라 '무명고지'로 올라온 AR 사수에 대한 목표 점령 후의 이야기는 꽤 많이 기술하고 있었다.
4. "돌격 앞으로!"
나는 중대장으로부터 공격 중의 상황보고를 위해 EE-8 전화기를 휴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근접되어 있기 때문에 무선통화 내용이 적에게 감청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EE-8 전화기를 줄로 목에 걸치고 전화선 드럼은 등에 메고 소대원들을 공격대기 지점으로 인솔하였다.
이동 중 멀리서 적의 박격포 사격소리가 들렸다. "펑! 펑!". 이윽고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상공에서 포탄의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끊기고 포탄이 낙하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마치 몽둥이로 등을 한대 얻어 맞은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나는 자세를 낮추고 포복하는 자세로 능선을 넘고 있었는데 마치 개구리가 동댕이쳐진 것 같이 땅 바닥에 동댕이 쳐졌다. 순간 뭔가 등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 왼쪽 어깨등을 손으로 만져보니 작업복이 찢겨졌고 그 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파편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이는 너무나 긴장한 탓이었을까? 혹은 대원들이 보고 있는 앞이여서 였을까? 다행히 대원들의 피해는 없었다.
09:00시 우리는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정상의 적의 진지가 희미하게 보이는 돌격선에 도착하여 착검을 하고 돌격준비를 완료했다. 사방은 새소리 하나 들리지않는 고요 속에 잠겨있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50~60m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수류탄 투척거리밖이다. 적의 진지는 산 정상에 있고 우리는 아래에서 돌과 흙으로 혼합되어 구성된 경사진 능선을 중심으로 기어올라가는 자세로 공격해야 했다. 우리는 2소대와 3소대의 동시, 병행공격 방법에 대하여 의논했다. 먼저 2소대장(김용겸 소위)의 제의로 호각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공격개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원들에게도 그렇게 전달하고 공격 신호를 기다리게 했다.
2소대장과 나의 "돌격 앞으로!"의 명령으로 호각 소리와 함께 일제히 우리는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이때의 우리는 전부 무아 상태였다. 그리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목표를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깍 차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있을 여지가 없었다.
이때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만일 적 진지에 총을 쏘면서 함성을 지르지 않고 대신에 은밀히 적진지에 접근했었으면 우리의 인원피해는 최소로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실 그렇게 할려면 해병들의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의 해병들에게 과연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에 대한 해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날의 2차에 걸친 돌격에서의 해병들의 행동을 냉철하게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해병들이 나의 "돌격 앞으로!"하는 돌격명령을 따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병들은 두번에 걸친 나의 돌격명령에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겁에 질려서 못따른 것이다. 이때 우리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지원사격을 받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지의 경사가 너무 심하고, 포탄으로 인해 바위가 모래같이 부스러져 있고, 포탄으로 움푹 파여진 자국들로 인해 미끄러져서 우리는 정상으로 빨리 뛰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의 돌격 함성과 함께 정상의 적 진지로부터 어린아이의 머리만한 크기의 검은색 소련제 대형수류탄이 정상으로부터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굴러내려와서 우리 앞에서 또한 하늘로부터 마치 죽음의 사자와 같이 우리 주변 일대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어떤 수류탄은 우리 앞에서, 어떤 것은 우리 머리 위에서, 어떤 것은 우리 뒤에서 마치 105mm포탄의 폭발 소리와 같은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여 해병들을 살상하면서 우리의 전진을 저지하였다. 동시에 우측의 암벽진지로부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순식 간에 해병들이 쓰러졌다.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쓰러진 해병들은 아랫 쪽으로 굴러갔다. 또한 부상당한 해병들의 구원을 요청하는 절규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아직도 그들의 구원을 요청하던 그 절규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순식 간에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돌봐 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계속 공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 적진을 향하여 돌격했다. 총을 쏘면서 함성을 지르고, 눈을 부릅뜨고 그야말로 무아 중에 앞으로 뛰었다. 불리한 여건이었으므로 앞으로 나가는 해병의 수보다 쓰러지는 해병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물론 그 중에는 적탄을 피하여 엎드리는 해병도 있었다.
적을 목전에 바라보고 우리의 공격은 돈좌되어 우리는 모두 엎드렸다. 적의 수류탄은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해병들은 계속 산 정상을 향하여 사격을 하고 있었으나 무엇을 보고 사격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의 바로 오른쪽 옆에 엎드려서 사격을 하고 있던 덩치 큰 AR사수의 사격이 갑자기 멈추었다. 철모를 쓴 얼굴을 땅에 묻고 있는 AR사수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으나 무반응이었다. 자세히 보니 적탄이 AR사수의 철모를 정면으로 뚫고 관통한 것이다. 뒤통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몇초 지났을까? 그 사수가 벌떡 일어났다. 순간 나는 그를 보고 놀랐다. 그는 완전히 일어서더니 뒤로 고목이 쓰러지듯이 쓰러지면서 아랫 쪽으로 굴러갔다. 세상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 나는 아직 그 AR사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아주 호남이었다.
사방에서 부상병들의 신음소리, 구원을 청하는 소리, 거기에 적의 수류탄과 박격포 포탄의 폭발 소리 등을 들으면서 우리는 전원이 엎드려 개인호를 삽으로 팔 수밖에 없었다. 나도 팠다. 그리고 그 속에 쪼그려 엎드렸다. 순간 멀리서 적의 박격포 사격 소리가 다시 들렸다. "펑!펑!" 10 여발의 소리다. 적의 박격포 포탄이 여러발 날아오는 소리가 "쉿,쉿"하며 들리더니 그 중 몇발은 우리 주변에 떨어지지않고 우리가 엎드려있는 바로 상공에서 갑자기 "쉿"하는 소리가 멈추더니 바로 우리의 머리 위로, 나의 옆에 떨어졌다.
(1) 박격포 포탄
박격포 포탄의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멈추면 그 포탄은 바로 우리 주변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그 포탄에 직접 맞을 수도 있다. 슬프게도 나의 전령이 그런 포탄에 그렇게 당했다. 이 포탄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가 아무 곳에나 멋대로 떨어지기 때문에 전투 중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포탄이다. 그것은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어떻게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호 속에 들어 있어도 박격포 포탄은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을 피할려면 뚜껑이 견고히 되어 있는 유개호 속이라야 가능하다. 이것은 여러 전투를 통해서 터득한 나의 귀중한 전투경험이다.
우리는 호 속에서 눈을 꼭 감았다. 어디에 떨어질까? 나에게 안 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이때의 우리는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의 간절함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그 순간만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그런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 순간은 생사의 기로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하나님을 위급할 때 찾게 된다는 것은 우리 속에 이미 그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 폭연 속에 살아진 나의 전령
그 순간 나의 바로 오른쪽 옆에서 폭발 소리가 났다. 머리를 들어보니 나의 바로 오른쪽 1m 지점에 호를 파고 들어가 쪼그리고 엎드려 있던 나의 전령인 양 해병(진해 출신)이 직격탄에 명중된 것이다. 포연이 사라진 후에 보니 나의 전령은 놀랍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움푹 파여진 호 속에서는 연기만 올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사람이 흔적도 없이 없어지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 같이 되었다. 아마 반미치광이 된 거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멀쩡하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이미 정신이상자이거나 또는 미친 사람일 꺼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옆에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젔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무슨 생각이 나는지?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어떤 말할 수 없는 공포감같은 것에 잡히는 듯 한 기분이 된다. 강제로 단축된 인간의 삶의 어떤 일면을 보는 것 같으며 또한 오늘의 나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죽음 앞에서 인간이 숙연해지는 뜻을 다시 새겨보게 된다. 나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 순간적으로 인생이 어떠함을 본 것 같았다.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고 순간 생각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도 하게 된다.
(3) 어떤 자매의 울음
내가 "도솔산"공격 중의 부상으로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의 병실로 젊은 자매가 찾아 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사한 나의 전령 양 해병의 안부였는데 나는 그들에게 "양 해병은 나의 전령이었는데 바로 나의 옆에서 공격 중 적의 박격포 포탄 낙하로 전사했다"고 말했더니 순간 그들의 슬피 울던, 아주 슬프게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울던 그들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순간 내가 그들에게 죄인이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내가 죽게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거야 말로 정말 전쟁의 비극의 산물이 아닌가?
(4) 우리의 삶의 자세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언제 가는 지도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 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간대를 성실하게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심정은 누구든 죽음 앞에 한번 서본 경험이 있으면 이해가 될것으로 생각된다. 이왕이면 칭찬도 듣고 서로 존경하면서! 선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을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즉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돕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삶보다 이웃을 위하고 이 나라를 위한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먹고 마시고 또 잠만 자다가 가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삶이 아닌가? 스스로의 삶을,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 스스로의 삶을 귀하게 생각하는 자만이 남의 삶도 귀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감사하며 그렇게 귀하게 살자. 서로 이웃을 위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나만을 위해 그렇게 방탕하게, 멋대로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고 귀한줄 알고 요긴하게,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기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전투 시에도 같은 이치이다. 그 결과가 이 공격 중의 나의 행동을 통해서 입증된 것이다. 물론 그 당시는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오랜 후인 지금에 와서 회상해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나는 수긍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3소대를 위해 내가 단신으로 적진지를 공격한 결과로 나는 적의 총알에 복부를 지근거리에서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로 두번째 전령을 잃었다. 지난 4월 "화천지구 전투"에서 피리와 꽹과리를 불며, 두들기면서 공격해 온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소대장 전령인 오봉후 해병(해병 4기 제주 출신)이 적의 수류탄에 의해 전사했다. 그 중공군의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는 전투 시 종종 들렸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머리카락이 위로 뻗치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었다. 아주 기분 나쁜 섬뜩한 느낌을 주며 또한 전투의지를 약화시키며 소름이 끼치게 하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었다.
소대장의 분신과 다름없는 전령이 2명이나 2개월 만에 전사했다. 그것도 나의 바로 옆에서! 그런데 어떻게 나만 멀쩡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와 그들과 다른 것이 뭐가 있어서인가?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인데 뭐가 달라서일까?
오봉후 해병은 수류탄 파편이 목에 꽂혔었는데 그 무서울 정도로 부어오른 목으로 인하여 아주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던 나의 전령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들것에 실려 후송되던 오봉후 해병의 명복을 지금 다시 빌고 싶다. 그때 오봉후 해병에게는 젖먹이가 있다고 했다.
(5) 적개심
이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마비된 듯 하였다. 머리 속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어떤 체념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수차에 걸친 공격에 많은 부하 해병들이 전사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책감과 강박감도 가중됐으리라, 나는 이때 솟구쳐 오르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통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것은 적개심이었다.
산정의 적을, 우리에게 많은 사상자를 강요한 적을 기필코 격멸하고야 말겠다는 적개심이다. 그 적개심은 통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게 만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군인은 그 적개심으로 적탄이 날라오는 속을 적진을 향하여 돌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병들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져 있어서 이젠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대원들은 소대장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건, 언제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항상 소대장의 얼굴을 처다보았었다. 무엇인가를 하소연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아무 묘안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좋은가? 이럴 때 어떻게 하라는 것을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했다. 이때야 말로 나의 결단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생각되었다. 누구에게나 살다보면 이런 순간이 있거나 혹은 오기마련이다. 단지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인지? 혹은 전체를 위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5 3소대장의 수류탄 공격: 수류탄 돌격소대장
그 순간 나는 어떤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결정했다면 웃읍겠지만 실은 누군가 나를 그렇게 결정하게 한 것이었다. 그 당시는 나도 그 영문을 모르고 지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결과로 나는 적의 총탄에 정통으로 복부(배꼽 밑)를 맡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아니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2소대장에게 "김 소위! 내가 저 정상의 적 진지를 분쇄하고 올터이니 뒤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2소대장은 "않돼. 너 올라가면 죽는 거야!"하며 극구 나를 만류했다. 그 옆에 있던 2소대의 어떤 분대장은 3소대장이 죽을 때가 돼서 이러는 것 아니야?하고, 또 어떤 대원은 3소대장이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수근거리는 소리들이 내 등뒤에서 들렸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좀 섭섭한 생각도 물론 들었으나 그 순간의 나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그리 큰 문제로 생각되지 않았고 또 죽는다는 생각도 전혀 나지않았다.
이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고 결심할 때까지는 주저하게 되지만 일단 어떻게 하겠다고 결심하니 나의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세상 일도 아마 그럴 것같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그들의 그런 소리는 나의 머리 속을 잠깐 스쳤을 뿐 나는 내가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스스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나인들 좋아서 단독공격을 하겠는가? 나는 단지 나의 책임을 다 할 뿐이다" 라고 그들에게 무언의 항변을 하면서 나의 뒷쪽에 엎드려 있는 소대원들에게 "산 위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면 쏴!"라고 지시하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 2발을 양손에 쥐고 허리에 수류탄 2발을 차고 엎드려 포복으로 정상의 적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렇게 요란스럽던 이곳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런 적막 속에 잠겨있어서 나는 마치 이 지구상에 나 혼자 있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질 정도였다.
한참 포복으로 기어올라가는데 나의 뒷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순간 정상으로부터 적의 시체가 굴러내려왔다. 정상에서 나를 발견한 적이 나를 저격하려는 순간 우리 소대원들이 일제사격으로 그 적을 사살한 것이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서 대원들에게 감사했다. 나를 살려줘서라기 보다 나의 명령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첫 위기를 모면했다.
땅 위에 혼자만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나는 계속 포복하여 적 진지로 기어올라갔다. 이때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고 무한 속에 있는 듯 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바로 머리 위쪽에서 적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상에 가까이 온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들고 볼 수 없다. 오른쪽의 적의 진지로부터 노출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주저했다. 그때 나는 철모가 아닌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수류탄을 쥐고 있는 양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웬 땀일까? 너무나 긴장해서 였을 것이다. 일어설까? 말까? 일어서는 순간 적의 총격에 사살되는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지난 일들과 함께 주마등같이, 번개처럼 나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것도 잠깐! 나는 무아 중에 벌떡 일어섰다. 이것 역시 내가 일어서려고 해서 일어선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행동이 나의 생각을 앞지른 것이었다. 아마 이런 순간을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정상에 우뚝 선 나는 적을 바로 코 앞 2~3m 거리에서 내려다 보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그 장면은 정말 생각할 수록 소설같았다. 아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장면 같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게 느껴지며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보이는 적들이 옆으로, 앞뒤로 판 호 속에서 수류탄을 모아놓고 우리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적은 내가 손을 뻗치면 손에 닿을 위치에 쪼그리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당시의 상황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생각이 나서 흥분이 된다. 정말 영화 속의 이야기같이 생각되나 이것은 현실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내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을 총으로 갈기면 알맞는 순간이었으나 나에게는 그때 총 대신 수류탄밖에 없었다.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으나 별수 없었다.
적은 우리의 공격에 대비하여 수류탄을 투척할 자세로 있는데, 그 순간 적과의 거리가 너무 근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양손에 쥐고 있던 안전핀을 뺀 수류탄 2발을 미리 격발시켰다. 이는 적이 주어서 다시 되던지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딱,딱"하고 수류탄의 격발 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리는 순간 수그려져 있던 적의 머리가 들렸다. 적의 눈과 나의 눈이 소리도 내지 않고 부딪쳤다. 생사의 불꽃이 튀기는 듯 했다. 순간 우리는 꼼짝도 않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한 것 같다. 나도 놀랐지만 적은 더 놀란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순간이었다.
순간 나는 급히 그들 속에 오른손의 수류탄을 던지고 또 왼손의 수류탄을 오르손으로 옮겨 던지고 엎드렸다. "쾅, 쾅"하는 폭음과 함께 나는 다시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도 뽑아 격발시키고 좀 멀리 던졌다. 그리고 해병들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마치 수영선수가 다이빙 하듯이 붕 떴을 때 "쾅, 쾅"하는 수류탄의 폭음을 들으면서 나는 40~50m의 거리를 곤두박질하면서 소대원들이 엎드려 있는 곳으로 굴러 돌아 왔다. 보통 때라면 땅 위에서 다이빙 하듯이 붕 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작이나 이때의 나의 동작은 위에서 붕 떠서 밑으로 떨어지는 그런 자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1)
순간 함성이 들렸다. 그 소리는 수류탄의 폭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우리 소대장님이 제일이다." 순식 간에 대원들의 두려움이 소멸된 듯 했다. 사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살았구나 하는 생각뿐 이었다. 그리고 나의 행운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후 나에게는 "수류탄 돌격 소대장"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6 3소대장의 피격: 인명재천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이 다시 공격을 계속해야 했다. 해병들도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한 듯 보였다. 멋있는 서부활극을 공짜로 봤으니! 사람은 그렇게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그리고 또한 소대장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대장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은 최소한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한 해병들에게 무언가, 어떤 감동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감동이 해병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고 또 해병들을 분발하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적의 완강한 저항에 주저하고 있던 해병들에게 하면 된다는 어떤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전투 중에 지휘관에 대한 믿음이 그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어야 한다.
비단 이것은 전투에서만 극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모든 분야에서 해당되는 사안일 것이다. 가정에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믿음, 직장에서 상사에 대한 믿음, 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믿음 등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에, 사회생활에서 무엇보다 필요로하는 신뢰이며 또한 상호의존일 것이다.
(1) 지휘관의 솔선수범
지휘관의 솔서수범은 그의 부하들에게 그 상관에 대한 믿음을 주게 되며 그 믿음이 유사 시나 위급할 때 그 지휘관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즉 지휘관의 지시대로 하면 된다는 그런 믿음이다.
그 믿음은 전우애로 승화되어 전투 시 자신의 생명을 전우를 위하거나 또는 상관의 명령에 의해 기꺼히 버릴 수 있는 희생의 정신자세로 변하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다. 솔선수범이란 남을 위한 희생의 정신의 발로이며 이는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정신, 즉 滅私奉公의 精神이기도 하다. 그것이 군인정신이며 또한 우리, 해병들의 정신이며 그것이 전승되거나 계승되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해병대의 전통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대장이기 때문에 맨 앞에 엎드려 대원들의 재차 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소대장의 공격 시의 위치는 항상 맨 앞이다. 따라서 소대장의 전사 확률이 높기 때문에 소대장을 그 당시 소모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상까지는 4-50m 내외의 거리인데 단숨에 올라가기에는 경사가 너무 심했다. 물론 수류탄을 투척해도 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거리다. 이럴 때 우리에게 유탄발사기가 필요했으나 우리에게는 이때 그것이 없었다. 정말 아쉬웠다. 그러니 우리는 이때 산 위의 적에게 직접 돌격하기 전에는 속수무책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전원이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60mm 박격포 사격도 요청할 수 없었다.
(2) 천우신조
그런데 산 위의 숲 사이에서 갑자기 "딱 콩"하는 총성이 들리더니 나는 마치 큰 방망이로 배를 얻어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으로 "앗"하며 몇바퀴 뒤로 뒹굴었다. 그리고 "맞았구나" 했다. 그 충격으로 나는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복부가 관통되었다면 어디인가 아플터인데? 피도 날텐데? 하면서 배를 더듬어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배꼽 밑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피가 흘러서인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즉시 권총탄띠를 풀고 자세히 보니 전투복은 틀림없이 총알에 맞아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치 쥐가 이빨로 옷을 물어뜯어 찢어 놓은 것 같이 전투복이 찢겨져서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멀쩡했다. 이걸 보고 나는 나자신이 놀라웠다. 어떻게 된 건지?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적이 쏜 총알이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사실은 죽을 꺼라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는데? 혹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진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붕 떠서 딩굴며 돌아왔을 때 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탄띠의 왼쪽에 걸어 차고 있던 탄창(칼빈 소총탄 15발)의 주머니(탄창 2개 들어 있음)가 나의 복부쪽으로 돌아와 있어서 그 탄창의 맨 위에 장전되어 있던 총알의 탄피(약협) 2개를 관통한 총탄이 관통력이 약해져서 총알이 회전하면서 나의 전투복을 뚫고 또 속내의를 뚫고 복부 위에서 기적같이 멈췄던 것이다. 끄집어 내보니 아직 따뜻한 적의 총알이었다.
이거야 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겠는가? 만일 1~2mm라도 그 총탄이 아래로 또는 위로 혹은 옆으로 맞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척추관통으로 전사했거나 혹은 하반신 마비의 불구자가 됐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짓말같은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구든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할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같은 일이라 한다. 그 기적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적은 오늘날도 우리의 주변애서, 또 우리의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기적은 나에게서 이 순간 일어난 것이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2)
소대장이 적탄에 맞아 뒹구는 것을 보고 침통한 표정에 잠겨있던 해병들도 내가 "안 죽었어!"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니 다시 함성이 터젔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오늘 벌써 두번째 듣는 "소대장님 만세"소리이다. "인명 재천(人命在天)"이라더니 정말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이거야 말로 정말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나는 "하나님 감사 합니다."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적탄에 급소를 맞고도 상처 하나없이 살아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지 알 수 없으나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음을 알자. 나는 이때 "이제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이상 더 큰 확신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 사실이 얼마 후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던 '자유신문(신익희씨 발행)'의 사설(1951년 6월 중순으로 기억 됨)에 "人命在天"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이 있다.
우리의 전투지역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식사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2일째 식사를 못하고 건빵과 물만 먹고 마시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상황보고를 하고 중대본부 지역으로 전원이 재공격준비를 위해 철수하였다. 중대장도 우리의 전투상황을 뒷고지에서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리가 없었다. 이때 중대본부 관측소와 우리 공격부대 간의 직선거리는 70~80m정도였다.
(3) K.S.C. 노무원
얼마 후 2일 간 밀렸던 식사가 K.S.C.(Korean Service Corps)의 노무원들의 지게로 운반되어 도착했다. 이들은 비전투원이지만 고생은 우리보다 더 하고 있었다. 그 험한 산길을 총소리를 들으며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를 대인지뢰의 위험과 포탄 낙하의 위험에 노출되면서 우리의 식사를 운반할 뿐만 아니라 탄약도 운반해주는 아주 고마운 형님같은 군번없는 군인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해야 했다.
이들은 우리의 전투력을 보강해 주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만일 이들의 헌신적인 목숨을 건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의 전투력은 그 만큼 감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밥은 1인당 철모에 수북히 가득 담아서 배식되었다.
이 철모는 우리의 밥통이며 물끓이는 그릇도 되고 때로는 세수대야도 되는 아주 요긴하고도 귀중한 전투장비이면서 우리의 생활도구이기도 하다. 때문에 적탄에 관통되어 철모로서의 역할을 못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귀중한 생활도구임에는 틀림없었다.
반찬은 소금과 함께 주먹만한 삶은 쇠고기 덩어리다. 우리는 철모에 수북히 담아있는 밥을 다 먹어 치웠다. 2일 분을 한끼로 먹어치운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양의 밥을 다 먹을 수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다 먹었다. 물론 나도 다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으니 결국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된다.
해병들의 얼굴에 희색이 되살아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이것은 배가 불러서 인지? 아직 살아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에서 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5시간 정도 푹 쉬고 잤다. 재공격을 위한 휴식 시간이다. 꿈 속에서 이들은 누구를 만났을까?
오전 전투에서 우리는 많은 희생자를 냈고 계속된 전투로 해병들은 무척 피곤한 상태이고 따라서 사기도 극도로 저하돼 있었던 해병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었다. 무엇을 이들은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목표 점령을 위해 다시 공격 준비를 해야 했다.
7. 대대장의 특별지시
그 와중에 중대통신병이 SCR-300 무전기를 가지고 나에게 왔다. 대대 작전장교(서정남 대위)로부터 나에게 직접 통신하겠다는 냉용이었다. "여기 3소대장입니다.Over" 했더니 대대 작전장교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렸왔다. "3소대장, 공격하느라 수고가 많지? 대대장님(공정식 소령)께서 이번 공격에서는 반드시 '무명고지'를 점령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으니 '무명고지'를 필히 점령하도록 하라"는 대대장 지시사항 전달과 함께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꼭 점령 하겠습니다."하고 응답했다.
얼마나 상황이 다급했으면 대대 작전장교가 중대장을 제치고 공격소대장에게 직접 목표 점령을 지시했을까? 이것은 더욱 나의 책임의 막중함을 다시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제1대대장 공정식 소령(제6 대 해병대 사령관)
그 특별지시는 나에게 큰 격려가 됐고 이번 공격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임무인가를 다시 깨우쳐 주었고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나는 소대원들에게도 같은 내용을 설명해 주고 더욱 분발할 것을 강조했다.
17:00시. 나는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켰다. 총원은 22명, 소대장을 포함하여 23명이다. 이때의 우리 모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40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번쩍이고 있었고 그 속에는 적개심이 불타고 있는 살기가 있었다. '견적 필살(見敵必殺)'의 살기이다. 물론 나도 그들과 같았으리라.
나를 보고 놀라 도망 친 여문관
이때의 나의 모습이 공격 중 부상당하여 미군 수송기편에 '부산'으로 후송된 다음 날, 2일 후에 부산의 해병대 사령부로 나의 동기생을 만나러 갔을 때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던 여문관이 나를 보고 "악"하고 기겁을 해서 도망가게 만들었다.
내가 전상으로 후송되어 부산 제2부두에 정박 중에 있던 해군 병원선에서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전투 중에 입고 있던 그 피로 얼룩져있는 옷을 입은 채로 지팡이를 짚고 용두산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로 동기생을 만나기 위해서 갔을 때 사무실에서 나를 본 여문관이 "악"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기겁을 하고 밖으로 뛰쳐 나간 일 이 있었는데 나중에 사유를 물어 보았더니 그 여문관이 나를 본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의 눈이 무서웠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도솔산 전투" 현장에서 2일만에 부산에 왔으니 나도 느끼지 못한 나의 눈 속의 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3소대의 생존자들에게 "자! 아침 공격에서 우리는 많은 동료 해병을 잃었다. 그러나 목표는 점령못했다. 이번에는 기필고 목표를 점령하여 전우의 원수를 갚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다. 나를 봤지? 적탄에 맞았어도 나는 살아있지 않아? 이제 각자 수류탄을 4발씩 휴대하고 가는 거야."하고 말했다.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해병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음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이제 공격을 개시하면 우리 중 누군가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전사할 것이고 그것이 내가 될지?, 어느 해병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운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信者)는 하나님께, 그렇지 않은 자는 그들의 믿는 신(神)에게! 그러니 누구나 할말이 있을 리 없다. 이제 곧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 그 죽음이 누구를 선택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8. 죽음 앞에서의 우리의 생각
우리는 이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명령에 따라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있을지 모를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살게 될지, 혹은 죽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는 사치품과 같은 소리로 나는 그때 생각되었다. 우리같이 목표 점령이 절실한 상황에 속에 있을 때, 그리고 많은 전우들이 전사, 상당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우리에게 과연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때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생각은 이거 였다.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 공격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지금은 그것 보다 먼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사한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이었다. 이것이 적개심이며 우리는 이 적개심으로 적을 살상하며 전투를 하는 것이다.
그 적개심은 우리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며 또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적을 격멸하게 하는 동력인것이다. 전투 시 이런 적개심이 없이는 전투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전투에 승리하여 해병대의 명예를 높이므으로써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던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를 이어갈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상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필요한가? 이때 우리에게는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우리에게 없었다.
오전 전투에서 나는 총보다 지형적으로 수류탄이 더욱 효과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각 해병에게 수류탄을 4개씩 분배하고 악수를 했다. 뜨거운 손, 찬 손, 거칠어진 손, 그 손들, 이 손들이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기필코 점령하고야 말것이라고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병들의 손을 잡았다. 이는 우리 해병대의 명예를 위함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이 나라를 위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어서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최선을 다 했다"라는 이 말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해병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이 내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만일 죽으면 국군묘지에 묻힐것이고 먼 훗날 우리들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겠지?하는 생각, 이것은 지금도 매년 현충일에 국군묘지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악수하는 대원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때 나는 "이 전투에서 내가 살아남으면 40세까지만 살아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 너무 다급해서 였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살고 싶다는 본능 때문에 였는지 알수 없었다. 아마 후자였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75세의 나이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오늘까지 나를 있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기 때마다 도와주셨다. 아둔한 인간은 평소에는 하나님을 안찾지만, 일단 위험 속에 빠지게 되면 무의식 간에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현명한 사람은 평소에도 그 하나님을 찾고 그의 도움을 힘입고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信仰人의 특징이며 또한 자세이다.
9. 재공격
17:55시. 우리는 미 해병대의 항공기 지원(Corsair 함재기의 기총소사)1회와 155mm 야포의 지원(중대1발)사격을 받았다. 18:00시. 우리는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공격지점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산개해서 엎드렸다. 이때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 속에 잠겨있었다. 이번에는 3소대가 주공으로 우측이고 2소대는 조공으로 좌측이다. 나는 엎드린 채로 손으로 소대원들에게 다시 착검을 지시했다. 육박전에 대비함이다.
아침과 같이 무명고지 정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소대원 중에서 특공조를 편성하기위해 지원자를 모집했다. 고호선 조장(해병 3기 제주 출신)과 현태순 AR사수(해병 4기 제주 출신)가 지원했다. 이들은 내가 평소에 눈여겨 보던 해병들이다. 특히 현태순 해병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서 일본 노래(나니와부시)를 잘 불렀었기 때문에 나도 자주 그의 일본노래를 들었었다.
나는 이들에게 공격준비를 시키고 중대장에게 연막차장 지원을 요청했다. 이것은 우리 3명이 함께 목표 정상에 우선 뛰어 올라가 공격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인원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도하면 상황이 아무리 위급해도 전원이 두따를 것을 생각해서 이다.
이윽고 멀리 후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105mm 연막탄이 "쉿"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목표 너머에 떨어졌다. 무전기로 나는 "원탄이다" 했다. 제2탄을 사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가 산개하고 있는 지역에 떨어졌다. 해병 몇명이 "앗 뜨거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연막탄이 아니라 백인탄이었다. 적과의 거리가 50~60m밖에 안되니 포병사격도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나는 무전기에 대고 이번에는 악을 썼다. "개놈 자식들 무엇하는거야?" 중대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미안해, 그래 알았어" 이어서 제3탄이 목표에 명중했다. 그런데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다. 중대장의 호통 소리가 무전기 속에서 나의 귀청을 때렸다. "망할 놈들 무엇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제4탄이 날아 왔다. 정확히 목표상에 다시 명중했다.
나는 무턱대고 일어서서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연막 속으로 목표 정상에 뛰어 올라 갔다. 연막으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우선 적이 파 놓은 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고 앞으로 업드리는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바로 왼쪽에 낙하하여 폭발했다. 그 순간 내가 조금이라도, 아니 0.01초라도, 늦었으면 나의 상반신은 폭풍에 의해 아마 날라갔을 꺼다.
나는 다시 나의 왼쪽부분, 특히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통증을 느꼈으나 곧 잊어 버렸다. 이때 나는 이미 적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옆을 보니 뒤따라 온 해병이 있었다. 그런데 아까 지원한 그들이 아니고 AR사수 고 해병(해병 4기 제주출신)이 바로 오른쪽 호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호 속에는 적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체온을 느낄정도였다. 정상에 우리 둘이 올라온 것이다. 우리는 호 속에서 앞을 보고 연막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10. 목표 점령
연막이 걷인 후 약 50m 전방의 바위 틈에서 우리쪽을 향해 장총으로 사격하고 있는 적의 독전장교가 보였다. 곤색바지에 국방색 상의에 모자를 쓰고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아직 못봤다. 그 적에게 나는 칼빈총으로 총격을 가했으나 불발이다. 노리쇠가 빠졌다. "어떻게 이럴 때 하필이면 불발이 난담", 하면서 나는 즉시 AR사수의 AR로 그 적을 연발로 쐈다. 바위사이로 앞으로 거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가 들어있는 호의 바로 너머에서부터 그 지긋지긋한 소련제 대형수류탄이 역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마치 까마귀떼가 죽음의 사신으로 우리를 향하여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수류탄은 전부 우리 둘의 머리 위로 지나쳐 우리 뒤에서 폭발했다. 우리는 우리 머리 위로 하늘을 날으고 있는 적의 수류탄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그 중의 한발 이라도 우리에게 떨어질세라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과 함께! 그런데 그 중의 1발이 AR사수가 있는 호 속으로 떨어졌다. "앗" 하는 순간 그 AR사수는 적의 수류탄을 주워 적진으로 되던졌다. 적진에서 "쾅"하고 터졌다. 이때 AR 사수와 나는 1m도 안떨어진 호 속에 있었다. 계속 20~30발 정도의 적의 수류탄이 날아오다 뜸해졌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하고 나는 우리 둘의 것을 모으니 수류탄이 8발이다. 나는 적이 바로 앞 너머 5-10m정도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격발시켜서 멀리, 가끼히 그리고 좌우로 고루고루 적진에 던졌다. AR사수는 적의 역습에 대비 경계케 했다. "쾅, 쾅"하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 오른쪽, 왼쪽에서, 그리고 멀리서 들렸다. 8발의 수류탄 폭발소리를 나는 세었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이제 육박전을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무아경 속에서 무명고지 정상에 우뚝 올라 섰다. 무슨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이런 행동은 훈련의 결과라 생각된다. AR사수도 뒤따랐다. 바로 앞에 도망가는 적들이 보였다. 2, 3명이 능선을 타고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돌격 앞으로!"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명령이다. 젖 먹을 때 힘도 합친 것 같았다.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했다. 순간 멀리서 "돌격 앞으로"하고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돌격 앞으로!"라고 외칠 때 그 기분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 기분은 마치 이 세상을 내가 움켜잡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의 감격은 뭐라 표현하기 조차 어렵다. 그리고 흥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그 당시의 기분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다.
"돌격 앞으로!"하는 인생은 얼마나 멋이 있을까? 그것은 누구보다 앞서는 삶이 돨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돌격 앞으로"를 두번 명령했다. 한번은 목표 정상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적이 어떤 상태에 있는 지 확실히 모르고 돌격거리에 도달했기 때문에 "돌격 앞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돌격함성을 질렀으나 그 소리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같은 그런 공포감을 물리치기 위한 인위적인 외침같은 것이었다. 누구든 겁을 먹거나 깜짝 놀라게 되면 무의식 중에 기성을 지르게 되는데 이 때의 우리가 아마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의 나의 "돌격명령"은 적을 격멸하고,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방어 중에 있던 적을 소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의 "돌격 앞으로!"의 명령 소리는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보다 더 컸다. 그리고 자신감에 넘쳐 있는 승리의 함성 그 자체였다. 나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멀리서 메아리치는 소리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 왔다. 그 메아리치는 소리는 마치 승리의 함성같이 들렸다. 도망가는 적들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2명, 3명, 사살하기보다 생포할 생각이 앞섰다. 우선 죽이기보다 어떤 적인지? 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돌격 앞으로!"하면서 나는 AR 사수와 함께 앞으로 뛰었다. 이때는 뒤돌아 볼 겨를도 없었다. 앞에서 도망가는 적을 잡기 위해서 였다. 뒤에서 해병들이 따라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와 아"하는 해병들의 돌격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보니 아무도 안보였다.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나는 급히 몇발짝 뒤돌아 와서 고지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우리가 적과 수류탄 투척 공방하고 있을 때 소대원들은 굴러오는 적의 수류탄을 피해 정상에서 20~30m 아랫쪽으로 물러가 엎드려 있었다.
이들을 보는 순간 나는 나를 따르지 못했거나 또는 따르지 않았던 해병들, 특히 분대장들에 대해서 화가 치밀어 올라와서 엎드려있는 그들의 머리위로 나의 M-2 칼빈 총으로 갈기고 싶은 충동을 강렬히 느꼈으나 나는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총구를 겨누었다. 이때의 나의 기분, 해병들에게 배반당한 것같은 그런 기분은 아무도 이해못할 것이다.
전투 시 소대장이 맨 앞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적진 속으로 뛰어갈 때 "와 아"하는 해병들의 돌격소리가 뒤에서 들리지 않을 때,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뒤따르는 해병이 아무도 없었을 때 그 소대장의 절박한 심리상태를 누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그때의 그 절박했던 순간을 되새기는 것만도 비록 오래 전의 일이지만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때 겁에 질려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들을 향해 산 정상에서 Carbine M-2로 총격을 가할려 조준까지 했었다. 산 정상으로 먼저 뛰어올라간 소대장을 따르지 않고 소대장이 죽건 말건 산 아래에서 겁에 질려 비겁하게 엎드려서 산 정상의 소대장을 쳐다보고 있는 그런 겁쟁이들 전부를 총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 무슨 해병대야"하는 그런 절망적이고, 폭발하는 감정에서 였다.
이 세상의 누구도 이런 소대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 앞에 서본 경험이 있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것은 그들이 측은해 보여서 였다. 나는 그들이 어려울 때 나를 처다보는 눈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측은해 보였다. 우리는 서로 공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하사랑의 감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역시 그들이 너무 하지않았는가? 생각되었다. 과연 어느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그들은 산 정상에서 소대장과 적이 서로 수류탄 투척전을 하고 있는 것을 아래서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소대장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았으면 당연히 소대장에게로 뛰어 올라 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엎드린 그대로 소대장이 수류탄 투척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과연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소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인하여 본능적으로 뛰어 올라왔지만 그들은 아직 그들의 사기, 전투의욕이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순간 느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나에게도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나는 지휘관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색 안할 뿐이었다. 특히 그 당시 분대장들은 평소에 신임 소대장들을 웃읍게 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나를 "소대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부를 때 "소대장요"라고 불렀다. 그렇게 잘 났던 그들이었다면, 이럴 때 그들이 먼저 아니 최소한 나와 함께라도 뛰어 올라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한명도 안보였으니 평소에 그렇게 큰 소리치던 분대장들은 어디로 다 갔단 말인가?
더욱이 특공조원으로 자원했던 해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특공조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그들에게 "누가 나와함께 연막탄이 목표에 떨어지면 올라가겠느냐?"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마지못해 자원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그들은 그들의 행동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들은 겉 다르고 속 달랐던 것이다.
적전에서의 이런 행위는 그 전투를 패배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후 나는 하사관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실전에서 터득한 큰 소득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생활에서도 나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평소에 말이 많커나 혹은 큰 소리를 치는 자는 위급 시, 전투 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1) 지휘관의 좌우명:
나는 나의 부하를 결코 어떤 편견이나 선입감으로 대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항상 명심하여야 할 것은 평소에 큰 소리 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은 실속이 없거나 또는 위급할 때 먼저 꽁무니를 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군생활을 통해서 내가 터득한 교훈이다. 대신에 위급할 때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지휘관은 항상 자기 휘하의 장병들을 사심없이 공정하게 대하여야지 어떠한 선입감이나 남의 중상하는 소리에 쉽사리 귀를 기울여 자기부하를 불신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고나 혹은 그렇게 대해서는 안된다.
그런 지휘관은 부하에게 상관에 대한 믿음을 결코 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런 지휘관은 반드시 실패하는 지휘관이 될 것이다. 부하에게 믿음을 못주는 지휘관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전투에서도 백전백패하게 된다. 전투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소대원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하고 다시 되돌아서 도주하는 적을 쫓았다. 이때는 해병들이 쫓아오건 말건 좀 무모했지만 그 순간은 쫓아가 적을 잡아서 해병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적 1명을 잡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소대원들에게 되돌아 가지않고 계속 도주 중에 있던 적을 쫓았으면, 2명을 충분히 생포할 수 있었을 것 같았었는 데 기회를 놓진 것이다. 정말 너무나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그 적을 어떻게 잡았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 였다. 그때야말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덮쳐서 잡았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나 있을까? 생각할 수록 무모한 나의 행동이엇지만 나는 오늘까지도 나의 그때의 그 순간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12. 육박전
이때 나는 근접전투(육박전)는 무슨 이론이나 또는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은 많은 훈련을 통해서 그 훈련 내용이 본능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몸으로 익히는 반복 훈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운동선수는 이 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그때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도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군인은 전투 중 적을 사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선 사람이 사람으을 죽인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속에 獸心이 있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전 본일도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죽인단 말인가? 나는 적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적은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면서 애걸하던 그 절망에 찬 애절한 적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이상한 소리
그 순간 어디선가? 사람의 말 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마라. 이것은 살인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때 나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소리에 나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이것은 살인이 아니다.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나는 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죽이지 마라. 이것은 살인이다". 그 소리는 역시 틀림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그 소리에서 나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으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어디서, 밖에서 들렸는지? 혹은 속에서 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적의 얼굴을 다시 노려봤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같은 동족인데 구태어 사살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는 그 "죽이지 마라. 이것은 살인이다"하는 소리를 들은 직후 였다.
결국 나는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 적을 구태여 사살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총구를 적의 얼굴에서 치우고 "일어 섯" 했다. 나는 이때의 "살려 주세요"하고 애원할 때의 그 얼굴, 그리고 총구를 치우고 "일어 섯" 했을 때의 적의 "살았구나"하는 그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그 순간 느꼈다. 그리고 그 포로의 얼굴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본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큰 자비를 베푸는자의 희열같은 것을 느꼈다. 결국 나는 그 포로를 사살하지 않고 후송시켰다.
(1) 나의 생애 최고의 자부심
나에게는 아직껏 내 생애의 최고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 "도솔산 공격" 시 나는 연대 목표인 #4 목표의 중간목표(무명고지)를 공격하면서 목표 위에 제일 먼저 뛰어올라가 "돌격 앞으로!"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무아 중에 일어난 평소의 훈련의 결과이다. 이것이 과연 강요한다해서 될 일인가?
이것은 평소의 훈련과 그에 따르는 정신무장의 결과이며 그 훈련의 결과가 본능적으로 순식 간에 도출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과연 이 나라의 소대장들 중 몇 명이나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기분은 세상의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상쾌한 기분이었다. 정복자의 기분이 아마 이럴 것으로 나는 생각된다. 나는 지금도 심신이 피로할 때,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 그때의 그 순간을 생각하며 현재의 나 자신을 회복하기도 한다.
둘째로 목표상에서 도주 중에 있던 적을 나의 부상(목표 위로 뛰어 올라간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바로 나의 왼쪽에 낙하하여 폭발해서 그 파편이 나의 왼쪽무릎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은 긴장으로 인하여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도주 중에 있는 적을 20m정도 추격하여 생포한 연후에 쓰러졌다는 사실이다.
목표 위에 뛰어 올라가서 도주 중인 적을 사살하지 않고 쫓아가 생포한다는 것 역시 무모하지만 어려운 일이 아닌가? 나는 그것을 해 낸 것이다. 이런 나의 무의식 중의 행동에 나는 나나름대로의 자부심을 안가질 수가 없다. 누구나 이렇게 쉽게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야 말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나의 최고의 정신 집중의 순간이었다.
그 지나간 아슬 아슬했던 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세상을 그렇게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어떤 강렬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그 위험 속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생명인데 평범한, 나 위주의 삶으로 단순히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이다.
즉 이것은 우리 전부를 위한 도전이며 또한 이것은 현재에 안주하여 정적 상태에 있지말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도약을 의미한다. 현재에 안주한다는 것은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 목표가 없다면 그런 자는 이미 죽은 자나 다름이 없다.
인간에게는 제한된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건, 이웃을 위하는 것, 혹은 이 나라와 이 겨레를 위하는 일이건, 특별히 이웃을 위하는 일에 최대의 성과와 결실을 얻기에 노력하여야 할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한 도리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2) 나의 생애 최고의 기분
그리고 아직껏 내가 잊지 않고 있는 순간은 목표상에서 "돌격 앞으로!"하고 외칠 때의 그 기분이다. 이 기분은 아무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기분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전투 중 "돌격 앞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소대장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나는 나의 실전경험에 비추어 볼때 그리 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공격소대의 맨 선두에서 "돌격 앞으로!" 할 때, 그 소대장의 위치가 노출되어 적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대장은 소모품이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것을 나의 생애의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나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다. 그 속에는 용기가 있고 또 전체를 위하는 희생정신과 함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렇게 살기를 노력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기를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우리,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생각을 나이가 많아지면서 더욱 하게 된다. 우리 각개인은 이 세상에 과연 무엇을 남겨야 할까?
12. 소대장의 부상 및 후송
나는 목표를 점령할 때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의해 몸의 왼쪽 부분, 겨드랑이, 왼쪽 다리 특히 무릎 관절 속으로 파편창을 입은 것을 잊고 있다가 목표 점령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왼쪽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쓰러젔다.
그때 적의 유탄(流彈)이 우리의 상공을 지나가는 두가지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퓽-", "퓽-"하는 소총탄이 지나 가는 소리이고 또 하나는 "슷, 슷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연발로 지나 가는 따발총탄의 소리였다. 소총탄은 앞끝이 뾰족하고 따발총탄은 앞끝이 둥글기 때문에 각기 날러가는 소리가 다르다.
그때 누군가 "소대장이요! 서있으면 위험하니 엎드려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분대장의 목소리었다. 그때 분대장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소대장님"하고 나를 부르기에 내가 너무 젊어서 좀 계면쩍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나 나나 비슷한 연령층에 속해 있었는데 내가 그들이 보기에 어리게 보여서 인것 같았다.
그때에 분대장들이 쫓아왔다. "소대장님! 이놈 사살합시다"하면서 성화가 대단했다. 그러나 나는 "이 포로는 소대장이 직접 잡은 포로이니 죽이면 않돼" 하고 사살 못하게 하고 후송 시켰다.
우리가 목표를 점령한 시간은 19:30분 경이었다. 그때까지도 주변의 먼 산을 볼 수 있었다. 공격을 18:00시에 개시하고 1시간 30분 걸린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2-30분 정도로 그렇게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쓸어지는 것을 보고 어떤 대원이 뛰어 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몸집이 꽤 커 보였다. 나를 부추겨 이르켜 세우고 자기 등에 업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한참 하산하고 있는데 올라오는 중대장을 만났다. "3소대장 수고했어"하는 그의 만면에는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중대장님 포로를 잡았습니다. 절대 죽이지 마세요"하고 중대장에게 당부했더니 "응 알았어"하고 그는 그대로 중대본부 요원들과 함께 방금 우리가 점령한 목표고지로 올라갔다. 나는 하산하면서 분대장들이 "소대장님 포로를 사살합시다"하고 나에게 조르던 그 말이 어쩐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
(1) 내가 생포한 포로
그 후 그 포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 나는 그 포로의 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5년 후인 1956년 여름에 나는 그 포로에 관한 소식을 부산 용두산에서 제대 후 사진사를 하고 있던 장이삼 3분대장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를 통해서 그 포로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슬픈 소식이었다. 중대장이 그 포로를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고 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그의 행위는 살인행위나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포로를, 그것도 같은 동족인데 아무리 전투 중에 적이었다 하지만 포로가 된 이상 그 포로는 동족으로 취급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포로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1980년대 후반에 그 중대장으로부터 나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때부터 30여 년 후이다. 나의 "도솔산 공격"에 관한 간증을 읽고 나에게 전화한 것이다. 내가 섬기던 교회의 주간지에 실린 나의 간증내용을 그에게 보냈는데 그걸 읽은 것이다. 그 내용 속에는 중대장이 그 포로를 잔인하게 사살했다는,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는 내용은 빼고,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측컨데 그 내용에 대한 자기 변명을 하려했을 것으로 나는 그때 생각되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현역시절에 "도솔산 전투"에 관해 한 마디도 나에게 안했던 그였다.
지금에 와서 내가 그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변명을 들은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다 해서 그 사살된 포로가, 나도 그때 현장에서 사살하지 않은 포로를,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잖는가? 나는 그가 스스로 자기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는 것으로 족했고 그의 살인행위에 대한 변명을 그태어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살인자는 만년에 중풍으로 쓸어졌다.
나는 어두운 밤길 고지능선을 따라 눈이 부리 부리한 덩치 큰 3.5인치 로켓포사수의 등에 업혀 밤새, 10시간 동안 넘어지며 뒹굴며 하면서 동이 틀 무렵에서야 대대구호소에 도착했다. 주간이라면 고지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1시간 정도로 충분히 대대구호소까지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우리는 밤새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이 캄캄한 전투지대에서 산길을 어데서, 어떻게 헤매다가 새벽에 대대구호소에 도착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이것도 생각할 수록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가물 가물하게 생각나는 것은 그때 우리는 대대구호소로 빨리 가기 위하여 고지능선에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온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때 1.000m 높이의 고지에서 밤 중에 경사도가 30-40도가 되는 험한 계곡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고 엎어지며 뒹굴면서 내려오다 기진맥진해서 필시 산 골짝에서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동이 틑 무렵에 새벽의 찬이슬을 맞고 깨어나서 대대구호소로 찾아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과연 10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그날의 다른 모든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내용만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때 나는 죽었어도 내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로서는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유야 어떻튼 나를 업고 하산하여 대대구호소까지 함께 간 그 대원의 고생이 어떠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내가 고생하게 된 것은 고지가 험준해서 들것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들것에 실려 우리의 후속부대인 제1중대와 제3중대 진지를 통과하여 2시간 정도면 대대구호소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대대구호소에서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았는데 위생하사관의 작은 실수로 상처가 악화되어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원주 비행장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C-54 미군 수송기편으로 K-9(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당시 부산 제2부두에 정박 중에 있던 한국 해군 병원선에서 1차 치료를 받고 다음 날 진해 해군병원으로 향발하였다.
(2) 독일로부터의 편지
2002년 12월27일 나에게 독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은 "자기는 '도솔산'공격 시 제2중대 소속이었는데 '무명고지' 점령 후 부상당한 어떤 소대장님을 업고 밤새 고생하면서 대대구호소로 갔던 기억이 있는데 혹시 그 소대장님이 아니십니까?"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소개가 있었는데 그는 해병 5기로 이름은 '정환구'라고 했다.
지금 내가 생각나는 것은 그때 해병 5기는 신병이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나를 업을 때 좀 겁에 질려있는 듯 보였다. 그는 해병전우지에 광고된 나의 저서(노 해병의 어제와 오늘 2002.8.15 출판)소개 내용을 읽고 혹시나 하고 나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는 50년대 후반에 독일에 광부로 와서 열심히 일한 결과로 이제는 가정도 이루고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는 그 편지 속에서 그의 근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 '정환구' 노 해병은 내가 잊을래 잊을 수 없는 나의 은인같은 고마운 해병이다. 나는 아직도 54년 전의 우리의 고생했던 그날 밤을 하루도 잊은 일이 없고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하게 된다. 그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집도 컸었다. 아무쪼록 이국 타향에서 그의 여생이 가족과 함께 편안하기를 바란다. 만일 주변 환경이 허락하면 나의 생전에 그를 한번 꼭 방문하고 싶다. 그런데 지난 2년(2004년, 2005년) 동안 그에게 나의 추가로 저술한 신간 책자를 두번에 걸쳐 보냈고 서신도 보냈는데 전혀 무소식이었다. 현재로서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나에게는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13. 놀라운 일
그런데 이 대대구호소에서 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당하고 또 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대구호소의 위생하사관은 병조장(상사)였는데 나의 왼쪽 무릎의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검게 된 상처를 위생가위로 가 제(Gaze)에 약물을 무쳐서 딲으면서 "이 정도 상처면 다시 중대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 하면서 상처부위의 가운데가 약 1cm 정도 좀 검게 돼 있어서 그 부분을 좀 세게 닦았는데 놀랍게도 거기에서 피가 갑자기 어린아이가 오좀을 누는 것같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위생하사관은 이걸 보고 무척 당황해 하면서 즉시 위생가위로 가제를 집어서 피가 흘러 나오는 부위를 닦고 자세히 보니 혈관이 터져서 혈관에서 피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위생하사관이 혈관을 잘못 건드려서 혈관이 터진것이다. 그는 즉시 터진 혈관을 실로 동여매면서 "야 위생병! Helicopter를 빨리 불러"하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는 나의 왼쪽 무릎관절 속에 파편이 들어가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고 나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대로 다시 돌아가야 했던 나는 중환자로 취급되어 Helicopter에 실려서 원주까지 후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겨난 의문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터진 혈관을 포탄 파편이 건드리지않고 피해서 관절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할 수록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아닌가?
만일 그 파편이 혈관을 뚫고 관절 속으로 들어갔으면 나는 밤새 고지에서 3.5" 로켓포 사수의 등에 업혀 10시간 동안 피가 그렇게 많이 흐르고 있는줄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쓸어지며, 딩굴면서 대대구호소로 가는 도중에 출혈과다로 틀림없이 사망했을 것이다. 이것도 기적같은 천우신조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14. 이날 나는 세번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첫째는 공격 중 지근거리에서의 적의 총격에 복부를 맞았을 때 나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았다.
둘째는 목표 위에 뛰어 올라 갔을 때 내가 호 속으로 뛰어 들어 갈려고 앞으로 꾸부린 자세가 아니었으면 나의 옆에 떨어져 폭발한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나의 상반신의 왼쪽부분은 완전히 묵사발이 되어서 전사했을 것이다. 아마 포탄의 폭풍으로 나는 날라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 파편 중의 하나가 나의 왼쪽 무릎 관절 속으로 혈관을 피해서 들어갔다.
셋째는 만일 무릎 속의 혈관이 포탄 파편으로 파열됬었으면 나는 후송 도중 혈관 파열로 인하여 대대구호소로 대원에게 업혀서 엎어지며 너머지면서 오는 도중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이런 사실들은 생각할 수록 아찔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하루에 세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었다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의 도움으로, 단독으로 '무명고지'를 공격하는 용기의 결과로 적탄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이다. 이 얼마나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일인가? 나는 만년에 그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사업에 15년 동안 감사하면서 헌신하고 내가 고희가 되었을 때 교회법에 따라 은퇴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기거나 또는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 기적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기적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 하룻 동안에 세번에 걸쳐 나에게 일어 날뻔 했던 죽음의 순간에 나를 도와주신 그 하나님께 나는 항상 감사하며 지금 살고있다.
그리고 나는 미군 수송기(C-54)편으로 부산을 경유하여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하여 1개월 간 치료 후 퇴원했다. 그러나 좌측 무릎 관절 속에 박혀 있는 파편은 제거못하고(당시의 의술로는 어렵다 했음) 1954년 미국 해병학교( Basic School. M.C.S. Quantico Va.)에 유학 중 상처가 졸업일을 2주 앞두고 밤 중에 갑자기 재발하여 미 해군 병원에 입원하여 좌측 무릎 관절 속의 파편 제거 수술을 아침 10시에 척추마취를 하고 시작한 후 야밤에 나는 왼쪽 무릎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서 깨어났는데 그때 시간이 밤 10시경이었다.
눈을 뜨자 왼쪽 다리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다리를 보니 놀랍게도 발등부터 왼쪽 다리 전체가 깁스붕대로 감겨져 있어서 통나무 다리같이 되어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 팥알 만한 크기의 까맣게 변색한 파편이 나의 침대옆 책상위에 있는 흰 종이 위에 놓여 있었다. 그후 나는 1개월 동안 해군 병원에서 치료 후 퇴원하였다.
15.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 수여식
나는 1개월 여일의 해군병원 입원 치료를 마치고 퇴원 후 진해에서 신편된 4.2"중대(중대장 김동윤 중위 해간 1기)에 배치되어 같은 해 가을 4.2"중포중대가 중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인 해병 제1연대로 출동할 때 함께 출동하여 중동부저선의 '만대리분지(Punch-Bowl)'에 도착하였다.
1951년 10월 14일, 우리, 4.2"중포중대가 이 지역으로 진입한지 몇주 지나서 였다. 나는 연대본부로부터 훈장수여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런데 나는 왜 훈장수여식에 내가 참석하여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모르고 있었고 또한 그 훈장이 나에게 수여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진해에서 읽은 동아일보에 났던 신문기사 생각이 나서 혹시 그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한달 전 이야기였다. 그 기사는 이미 지난 9월12일에 동아일보에 났었는데 그때부터 1개월이나 지나서 이다. 그리고 "도솔산"전투 후 4개월 만의 일이다. 좀 너무한 해병대 사령부의 상훈처리가 아닌가?
(1) 누가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추천했을까?
그런데 나는 그때 누가 나를 전투공로자로 추천했는지 도저히 짐작이 안갔다. 정상이라면 당연히 "도솔산 공격" 당시의 제2중대장(이응덕 중위 해간 1기)이 추천했어야 했지만 그 중대장은 나의 특진내신을 상신하라는 해병대 사령부의 지시를 거부한 중대장이었으니 그가 나를 위한 훈장내신을 상신했을 리는 만의 하나라도 없었다.
그의 특진내신 거부이유는 자기도 특진 안시키면 공격소대장이었던 3소대장, 이근식 소위의 특진내신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의 인사담당 계장이 나의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그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므로서 나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관이 있다는 사실은 사실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추천했을까? 그 당시 전투 중에는 통상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전방관측장교가 미 해병대에서 공격 중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 제2중대에는 미 해병대 전방관측하사관이 파견나와 있었는데 나와는 농담도, 말은 잘 안통했지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의 일부는 할 수 있었다. 전선에서 고락을 함께 하게 되니 우리는 자연발생적으로 서로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이다.
하루는 그가 자기 누이동생이라면서 귀여운 젊은 여자의 탁구치는 사진을 나에게 주었는데 그 사진 뒷면에 "This picture was taken when I was not looking"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이 미 해병 전방관측하사관이 중대 OP에서 중대장과 함께 우리, 3소대의 공격상황과 나의 단독공격행동을 관측하고 자기들의 보고계통을 통하여 상세히 보고한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것은 나의 특진내신이 현지부대로부터 상신된 것이 아니고 사령부에서 직접 해병 제1연대로 특진내신 제출을 지시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나에게 수여된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도 현지부대의 내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역시 미 고문관측에서 그들의 계통을 통해서 보고받고 결정하여 수여한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나의 미국 은성무공훈장 수여사실을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발표한 것도 실은 해병대 사령부 고문관실에서 전투현장의 고문관을 통해 직접 보고받고 결정한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당연히 현지 부대지휘관으로부터 그런 전투상황을 포함한 전투유공내신이 제출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은 고문관실에서 한국 해병대측으로부터 수여 요청을 받고 수여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2) 무공훈장 수여식
나는 시간에 맞춰서 연대본부에 도착했는데 이때 연대본부 요원들이 연병장에 이미 도열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대장(김동화 대령), 부연대장(고길훈 중령) 및 연대 일반참모들과 함께 미 해병 수석고문관(대령)이 도열부대 옆에 섰다.
10:00시 무공훈장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미국 정부가 나에게 수여한다는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이 키가 크고 바싹 마른 미 해병 수석고문관, 대령으로부터 영문전투공적서 낭독과 함께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 공적서는 "귀하는 "도솔산 공격 전투"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잘 싸워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 공로로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은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싸웠는가?하고 헷갈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로부터도 뭔가 있을법한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한국 정부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당연히 수여되어야 할 한국훈장이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혹시 누군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은 행정부서에서 서류상으로 훈장수상 대상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전투에 참전도 하지 않은 자가 훈장을 탄 사례에서 우리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을지무공훈장을!
그리고 도열하고 있던 연대본부 인원들이 나에게 대하여 "받들어 총"하는 경례에 나는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이것으로 훈장수여식은 끝났다. 그러나 이때 나는 소위계급인 나에게 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들은 소위에게 "받들어 총"으로 경의를 표한것이 아니라 훈장수상자에게 경의를 표한것다.

US Silver Star Medal(미국 은성무공후장)




16. 전투 공로 포상
이 전투에서 제2중대장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나를 따라 목표 위로 뛰어 올라갔던 AR사수 고 해병은 '미국 동성무공훈장'이, 그리고 나에게는 '미국 은성무공훈장(U.S.Silver Star Medal)'이 각각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후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3분대장(장이삼 삼등병조)은 1계급 특진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56년 여름 전역 후 부산 '용두산'에서 사진사를 하고 있던 3분대장을 우연히 만나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고 해병은 적을 계속 추격 중 애석하게도 적의 따발총 사격에 의해 전사했다는 슬픈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 해병은 평소에 말이 통 없었고 성격도 아주 내성적이어서 때로는 동료 해병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3소대에서 어느 누구보다 과목한 해병이었다.
그런데 목표 #4를 점령못한 제2중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는 사실은 해병대의 상훈제도에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후 제2중대는 "도솔산 공격"이 완료될 때까지 공격 중 제2중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할 만한 현저한 전과를 제2중대가 올렸다는 기록이 '해병전투사'의 기록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전투를 통하여 "원래 말이 없거나 말이 적은 사람은 그의 행동으로 말을 대신한다"는 사실과 말이 많은 자는 말로써 끝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꼭 명심하고 군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생활에서도 조심하여야 한다. 특히 말이 많은 자는 말뿐임을 잊지 말자.
나는 제2중대장이 '을지무공훈장'을 탔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오랜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는 군생활 중 "도솔산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한번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랑스러워야 할 '을지무공훈장'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는 나에게만은 할 말이 없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일까?
그는 나의 특진내신을 내라는 해병대 사령부의 지시를 자기를 특진 안시키면 3소대장의 특진내신을 낼 수 없다하여 묵살한 사실을 내가 알게 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해병대 사령부 인사국 보임계장인 나의 동기생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듣고(1951년6월 중순)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어쳐구니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상관이, 장교가 있다는 것은 해병대의 발전을 위하여 서글픈 일이다.
그런 반면에 "도솔산 전투" 시 소대장들 중 2명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는데 1명은 60mm 박격포소대장이었고 또 다른 1명은 대대작전보좌관이었다. 이들은 그 당시의 상관, 중대장의 추천에 의해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던 것이다. 같은 중대장이지만 이렇게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부터 오랜 후에 "도솔산 전투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1) 누구를 위한 전투인가?
그러면 나는 과연 어느 나라를 위해 싸웠단 말인가? 나는 정말 대한민국정부에 묻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것이지 미국을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잖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정부는 미국정부에서까지 나에게 전투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왜? 나에게는 무공훈장을 수여하지 않았는지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중대장에게는 한국훈장을, 나에게는 미국훈장을 나눠서 수여했단 말인가?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다. 관례적으로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이 수여되면 같은 훈격의 한국훈장(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필시 누군가에 의해서 나에게 수여된 한국훈장이 가로채어졌다고밖에 생각안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누구일까?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여기에 누구라 지적할 수 없을 뿐이다.
(2) "해병전투사"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
그때부터 오랜 후에(2005년) 나는 나의 저서(노 해병의 어제와 오늘 2002년 8월 15일 발간)에서 "도솔산" 전투 중 #4 목표의 중간 목표인 "무명고지 공격"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보완하여 추가로 저술하기 위하여 해병대 사령부발행(1962. 6. 15) '해병전투사(제1집 증보판)'를 읽다가 그 속에서 놀라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내용 속에서 "도설산 공격" 중 제2중대의 '무명고지'점령(6월7일 19:30시 3소대가 점령 소대장 이근식 소위) 후 공격을 계속했으나 실패하고 다음 날(6월8일) 07:30시에 제2중대는 목표 #4를 재공격했으나 역시 점령못하고 11일 제1중대가 제2중대를 초월하여 야간공격으로 목표 #4를 점령한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날 새벽(6월8일) 제2중대는 적의 역습을 받지 않았다는 새로운 사실도 그 속의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어 나는 놀랐다. 이 새로운 사실은 내가 오랫 동안 궁굼해 하고 있던 두가지 사실에 대해서 일시에 해답을 나에게 주었다.
1) S 소위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S 소위는 '원주'비행장에서 나에게 그날(6월8일) 새벽에 적의 역습을 받았다고 말했고 그때 새끼발가락을 부상당했다고 했다. 물론 두려움으로 인한 돌발적인 행동은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으나 그 사실을 음폐, 또는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벽에 적의 역습을 받지 않았는데 적의 역습을 받았다고 작전을 구실로 삼아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그때 제2중대가 적의 새벽 기습을 받은 일시는 8일 새벽이 아니고 7일 새벽이었다. 그 시간에 우리, 3소대는 중대본부 인근에서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따발총 소리가 갑자기 안개가 무척 짙게 끼어서 마치 안개가 연기처럼 보이는 새벽에 요란스럽게 들렸다. 이때 해병들은 처음에는 놀라서 약간 후퇴했으나 적의 병력이 4-5명 정도임을 알고 즉각 역공하여 적을 격퇴시켰었다.
그러나 S 소위가 말한 날은 다음 날인 8일이었다. 그때 제2중대는 새벽에 적의 기습을 받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 당시의 긴박하고 어려웠던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때 공격에 참여했던 해병들도 용납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이미 오래 전의, 이미 잊혀진 일일 수 있으나 그대로 나는 여기에 기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해병들이 희생당했는데!
그리고 또한 그때, "도솔산 공격" 시 제2중대 소대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대장을 했다는 등의 내용은 우리, 당시의 소대장들을 모욕하는 것이니 또한 용서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굳이 "도솔산 전투" 시 소대장을 했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럴 필요도 사실은 없었는데 왜였까?
2) 제2중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될 근거는 없었다.
또한 제2중대는 6월9일 10:30시에 목표 #4의 공격에 실패하여 6월10일 06:00시에 제1중대가 제2중대를 초월하여 #4 목표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때(6월10일) 02:00시 연대장실에서 각대대 부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주간공격을 중지하고 야간공격을 감행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이리하여 제1대대 제1중대는 11일 02:00시에 목표 #4에 대한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05:10시에 공격개시 6일만에 목표 #4를 점령하였다.
그후 "도솔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제2중대는 제2중대장이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을 만한 특별한 공훈, 전과가 없었다. 그것은 그후 '해병전투사' 속에 제2중대의 활동상황, 공격상황이 전혀 언급이 안됬었다는 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2중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공정한 훈장 수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제2중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을까? 그것은 당사자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2중대장이 무슨 이유로 S 소위가 부상도 안당했는데 전투지대를 이탈한 것을 묵인했는지도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 당시의 전투상황하에서 제2중대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S 소위는 전투지대를 무단이탈한 것이다. 즉 도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일 알고도 모른척 했다면 제2중대장은 적 전에서 진지이탈자를 무긴한, 전투 중의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제2중대는 내가 3소대장으로서 목표 #4의 중간목표인 '무명고지'를 점령한 후 부상으로 인하여 후송된 후에 계속 공격하였으나 목표 #4를 점령못하고 제1중대가 제2중대와 임무를 교대한 후 야간공격으로 목표 #4를 점령한 것이었다.
S 소위도 나에게 그의 비굴한 행위가 탈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에 와서 그의 그 비굴한 행위, 전투지대 이탈, 가 이렇게 '해병전투사'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세상에 공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생각안했을 것이나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 '해병전투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3소대의 L 분대장이 S 소위에 관해서 나에게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서 나는 그 동안 그 진위를 확실히 모르고 있었는데 '해병전투사'를 읽으면서 그 L 분대장의 말이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L 분대장은 S 소위가 전투 중 도망갔다고 비난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 이럴 수 있을까?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는 것을 나에게 다시 확인하게 했으니 얼마나 잔인한가? 이것은 당시의 해병대 사령부의 전시 상훈제도가 얼마나 엉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3) U.S.Siver Star Medal vs 화랑(무성)무공훈장?
1953년 3월 초 나의 전상 후유증(좌측관절 파편창)으로 인하여 해군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 내가 사령부 군목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 인사국으로부터 휴전(1953.7.27)을 앞두고 "전투에 참전하여 한국훈장을 못탄 장교는 공적서를 작성하여 언제까지 제출하라"는 지시공문이 각부서로 시달되었다. 이 얼마니 웃기는 소리인가? 자기의 전투공적서를 스스로 작성하라는 지시이니!
나도 '미국 은성무공훈장'은 미국정부로부터 탔지만 한국정부로부터의 훈장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전투공적서를 내가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훈장 중 최하위급인 화랑(무성)훈장이 3월 30일부로 나에게 수여된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미국정부는 나의 전투공적에 대해서 '미국 은성무공훈장'(U.S. Silver Star Medal)을 전투지 현장에서 수여했는데, 한국정부는 같은 내용에 대하여 '무성화랑훈장'을, 그것도 무슨 선심이나 쓰듯, 훈장을 배급이나 하듯 나눠 주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전투공적에 대한 서훈인가?
(4) 3소대원 전원에게 무공훈장 수여
오랜 후인 2003년 3소대원의 수기(참전실록, 3, 4기 해병대 전우회 제주 소재) 속에서 그때의 3소대 전원에게 화랑무공훈장 또는 충무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병 제1연대 전원에게 대통령 표창까지 수여되었다는데 어떻게 나는 그 명단 속에서 누락되었을까? 그 목표고지를 누가 점령했는데? 이런 경우 나는 무어라 하면 좋을까? 이거야 말로 지금에 와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잘못된 과거지사는 반드시 올바르게 고쳐놓아야 한다.
(5) 통곡할 일들
그 뿐만 아니다. "도솔산 전투" 공로로 소위에서 중위로의 특진도 중대장의 소갈머리 없는 아집(자기를 특진 안시키면 소대장의 특진내신을 낼 수 없다는)으로 무산되었고 또 대위 진급 때는 3개월 이상 소총중대장을 한 중위는 전원 대위로 진급됐는데 나는 4개월 이상 중대장을 하고도 대위진급이 안됐다. 그것은 내가 전상입은 왼쪽 무릎관절의 상처가 재발하여 해군병원에 재입원했었는데 그것이 사령부 인사국 기록에 일반입원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진급예정자 명단에서 제외된 통곡할 일도 있었다.
군에서 진급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당사자뿐만 아니라 군출신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인은 진급을 통하여 그의 인간됨이 평가되기 때문이며 또한 최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진급시기를 두 번이나 놓쳤다. 그것은 소위에서 중위로 특진, 그리고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전투 중 세번이나 죽음을 면한 것으로 이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대신하고 감사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의 도움이었음을 확신하며 항상 감사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17. 人命在天
1951년 7월 10일부로 나는 "도솔산 전투" 시의 부상으로 진해 해군병원에 1개월 간 입원, 치료 후 진해에서 새로 편성된 4.2"중포중대로 배치, 발령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사무실에서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아주 놀라운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그 당시 부산에서 발행하고 있던 자유신문(自由新聞 발행인 申翼熙)의 사설이었는데 그 사설의 제목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었다.
그 내용은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가 '도솔산'을 공격 중 해병대의 L 소위가 적의 총알을 복부에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설명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기사를 무심코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그 기사 속의 인물, L 소위는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로부터 듣고 기사화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비교적 그 내용은 그 당시의 전황을 그대로 잘 묘사하고 있었다. 그 사설의 결론은 "인명은 재천이다"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 사설을 읽으면서도 나로서는 그때 운이 좋아서 죽지않고 살 수 있었고 총알이 사람을 피한다는 어떤 막연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사, 사설을 읽고 나는 "인명재천"이라는 어휘와 의미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기사를 통하여 나는 적탄에 의해 죽지 않는다라는 어떤 알 수 없는 확신과 용기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 그후부터는 나의 생명은 재천이니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나는 전투 중 절대 죽지않는다는 확신으로 두려움 없이 전투를 할 수 있었다.
"구원의 손길"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고 노년기에 들어서 깨닫게 된 사실은 그런 것은 나의 우매한 생각이었고 실은 나를 항상 위험 속에서 돌봐 준 그 구원의 손길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구원의 손길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제2중대 출신 장교 8명(중대장 이응덕 중위 및 후임중대장 박희태 중위 소대장 최영남 소위, 김용겸 소위, 김동규 소위, 이근식 소위, 후임소대장 김영호 소위, 박천뢰 소위) 중 아직 생존하고 있는 장교는 3소대장이었던 나(이근식 소위 예비역 해병 대령) 홀로 70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을 뿐, 7명은 나와 이미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이거야 말로 '인명 재천'이 아닌가?
특히 "도솔산 공격" 시 나와 함께 공격한 2소대장 김용겸 소위는 30대 초에 중령의 계급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목표를 단독으로 공격하겠다 했을 때 "너 올라가면 죽는 거야"하며 나의 단독공격을 극구 말리던 그가 그때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었던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거야 말로 '人命在天'임을 현실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들 중 3명은 "도솔산 전투"와 중동부전선의 "김일성고지 전투"에, 4명은 "김일성고지 전투"에 참전하여 생존하였으나 그들은 1965년부터 2003년까지의 기간에 전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 중 나와 가장 가까히 지냈던 김영호 대령은 2003년 여름에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믿기는 나도 나의 삶의 변화가 없었으면 그가 타계한 같은 해에 나도 갔으리라. 그리고 김재룡 대령도 같은 해 11월13일에 암으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셋은 군 생활을 하면서 대령시절 진해에서 1년 동안 형제같이 가까히 지내면서 독주를 즐기던 친구였으나 1986년 9월 내가 하나님의 사업(여전도사 양성)에 동참하게 된 후부터 우리의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졌었다. 그들은 내가 술을 끊고 안마신다고 말한 날부터 여태껏, 17년 동안 그들이 타계할 때까지 그렇게 아침, 저녁,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던 전화도 일절 끊고 없었다. 나는 이런 그들을 보고 무서운 세상이라고 놀랐다. 우리는 동기생이라기보다 단지 술친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 것이다.
꿈 속에서 만난 그들 ( 김영호 대령, 김재룡 대령)

좌로부터: 필자, 이근식 대령 김영호 대령(사망 2003.6) 좌병옥(사망 5중대3소대장)

좌측부터: 김재룡 대령(사망 2003.11.13) 필자 이근식 중령 김연상 준장
나는 그들의 타계 후 약 1년이 지나서 꿈 속에서 그들을 한번 만났는데 마치 대형Screen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회색가운을 입은 사자(死者)들과 함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을 그들 둘이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생자(生者)인 나의 앞을 지나면서 김재룡 대령(기독교 신자)은 나에게 "너 요즘 평이 좋지 않더라"고 말하면서 지나첬는데 마치 생시에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고 그의 왼쪽의 김영호 대령(천주교 신자)은 모른척하고 그대로 앞만 보고 지나 갔었다.
그들은 전부가 전혀 무표정했었다. 그 꿈은 너무나 생생하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어서 나는 마치 생시의 그들을 보고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너 요즘 평이 좋지 않더라"한 말의 뜻이 나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지 나는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그 의미를 대략 짐작은 할 수 있다. 그의 말은 현세를 시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세계를 시사하는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지금에 와서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나의 생활의 변화가 없이, 세상적인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 그대로 지냈으면, 하나님의 사업에 뛰어 들지 않았으면, 나도 이미 이들과 함께 같은 해인 2003년에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다. 그러니 나는 나를 전쟁 속, 위기 때마다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손길, 내가 믿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된다. 이것은 독자들이 믿건 안믿건 나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 1951.6.7 나와 함께 연대목표 #4의 중간목표인 '무명고지'를 공격한 2소대장 김용겸 소위(우측 타계) 대위 시절(진해) -1953.10.-

#"도솔산 공격" 시 3분대장(장이삼 이등병조)과 함께(1956년 겨을 함상에서)
그때 나는 21세의 약관이었다. 나와 함께 목표를 공격한 김용겸 소위는 중령으로 예편 후 30대 초반에 타계했다. 나의 죽음을 염려하여 나의 단독 공격을 극구 만류하던 그가 먼저 간것이다. 이것은 人命在天이니 누구도 이 천리를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실증이기도 하다.
- 끝 -
참조:
최근 덧글